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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우체국에서 37년째 우편물을 분류하는 중년의 '에드 색스버거', 그는 퇴근 후에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며 고즈넉한 일상을 보낸다. 가족과는 거의 왕래를 끊은 듯 독신자 생활에 익숙하다. 평범한 노동자인 그에겐 실은 주변에 알리지 않은 과거가 있다. 바로 시인이란 것. 젊을 적 일이긴 하지만, 정식으로 시집을 출간한 적도 있다.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스틸
ⓒ 티캐스트
과거를 묻은 채 조용하게 살던 그에게 어느 날 문학을 전공하는 '마이어스'란 청년이 나타난다. 자신의 팬이라며 친구들과 함께 하는 문학 모임에 초대하고 싶단다. 마지못해 따라간 그곳에서 에드는 상상치 못한 찬사에 휩싸인다. 젊은 시절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마이어스는 모임에 합류하길 청하고 자신들과 더불어 낭독회를 열자고 제안한다. 일이 자꾸 커진다.
복고 열풍에 올라탄 노 시인의 일장춘몽
여기 한 무명시인이 있다. 1960년생의 청년은 무작정 동경하던 뉴욕으로 17살에 상경한다. 1977년의 일이다. 2년 후 그는 당대 문학 사조에 영향받아 첫 시집을 내놓는다. 비평적으론 괜찮은 평가를 얻었지만, 이 시집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된다. 세간의 유명세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뉴욕 우체국에서 매일 편지를 분류하며 37년간 지내왔다. '내가 한때 시인이었지' 하는 추억만 남긴 채 환갑을 넘긴 노인이 된 처지.
이대로 조용하게 황혼을 맞이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 에드는 달리 물욕도 없고 현재 생활에 만족하는 듯하다. 친지와 관계가 그리 좋진 않아 보이지만, 직장 동료나 이웃들과는 원만하게 지내며 함께 당구를 치고 스포츠 시합을 응원하곤 한다. 넉넉하진 않아도 한 몸 건사하는 데 모자랄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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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털터리로 뉴욕에 처음 입성할 때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노후다. 하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마이어스와 문학청년 무리가 그의 잔잔하던 심장을 들쑤셔 놓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 에드 역시 자식 뻘 청년들이 본인의 작품을 읽고 팬이라며 칭송하는 게 얼떨떨해도 불쾌할 턱이 없다. 이들은 요즘엔 진짜가 없다며 다들 SNS 중독에다 알고리즘의 조종을 받으며 인플루언서가 되길 꿈꿀 뿐이라 비판한다. 자신들은 과거의 진실된 문학과 예술을 추종한다며 에드를 마치 고대 유물이나 살아있는 화석처럼 반긴다. 그들의 열기에 전염이라도 된 듯, 그 역시 잊었던 청년 시절의 꿈과 야망이 시간여행을 온 듯 부활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진짜 예술을 펼칠 이벤트를 열기로 한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에드에게 그들은 동참하길 권한다. 얼떨떨하지만, 뭔가 오랜만에 해보고 싶다. 새로운 시를 써보라는 제안도, 출판 에이전트와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권유도 흔쾌히 수락한다. 37년 만에 어쩌면 젊은 날의 꿈이 이뤄질 것 같다. 그는 오랫동안 잊었던 자신의 과거 작업을 꺼내고 시상을 얻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오랜 세월 멈췄던 창작욕이 본격 가동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안적 세계관을 갖추기엔 아직 모자란 청년세대 풍경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스틸
ⓒ 티캐스트
이것은 어느 무명 예술가에게 찾아든 겨울의 한 줄기 햇살 같은 이야기다. 어쩌면 '한겨울밤의 꿈'이랄까. 주인공은 패기와 열정 넘치던 청년 시절 추억을 빛바랜 시집 한 권으로 간직한 채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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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일상이 갑자기 찾아온 팬들에 의해 허물어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예술혼이 꿈틀거린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일찍 등장했던 건 아닐까? 에드는 기분 좋은 현기증에 비틀대며 그들 뒤를 따른다. 수십 년째 정지된 시계가 돌아간다.
청년들의 비주류 문학 모임은 자신이 보았던 뉴욕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얼핏 닮은꼴로 느껴진다. 소호 거리를 누비던 가난하지만 호기롭던 문인과 예술가들을 예찬하며 상업적인 속류 유행을 경멸하는 청년들과 죽이 척척 맞는다. 요즘에도 이런 기특한 친구들이 다 있구나 경탄하며 에드는 이 변화가 즐겁다. 좀 낯 간지러운 찬사가 부담스럽긴 해도 나쁜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그에겐 곧 이들 모임 내부의 공백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노동자로 평생 살아온 에드와 달리, 이들은 대개 학비 비싼 명문대학교에 다니며 땀을 흘리지 않고 부모의 후원이나 상속으로 유유자적한다. 옆자리 온라인 스타들을 헐뜯으면서도 묘하게 신경 쓰거나 동경하는 눈초리도 포착된다. 사회비판과 예술지상주의를 목청 높여 외치지만, 고민 수준이 깊거나 자신들의 조건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글을 창작한다지만, 정작 에드는 그들의 작업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공허한 수사학만이 그들 주위를 공전한다.
어쩌면 그들은 다만 '힙스터'일지도 모른다. 남들과 차별화하고 싶지만, 뚜렷한 자신만의 세계관이나 철학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그저 주류의 속물성과 도매금 취급받고 싶지 않지만, 그럴수록 주변 시선에 더욱 민감해지는 역설에 봉착한다. 그들에 대해 에드가 직장 동료에게 설명하듯, 일부러 가난해 보이도록 옷차림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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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무위도식하는 그들의 고급 주거는 에드의 집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가난을 훔치는' 이들의 부유한 실체는 속속 확인되다.
위선과 허무만 남은 21세기 문화판의 초상
▲ <나의 사적인 예술가> 스틸
ⓒ 티캐스트
어쨌건 주인공은 은근히 인맥 짱짱한 그들 덕택에 기회를 잡을 듯하다. 운 좋으면 평생 꿈꿨던 전업 작가의 길을 뒤늦게나마 걷게 될지도 모른다. 출판 에이전트는 요즘 유행에 딱 맞는 모델이라며 묻혔던 작가의 '재발견'을 언급한다. 에드는 자신의 청년기를 응축하듯 담은 시집의 재출간을 기대하는데 출판사가 바라는 건 현대판 고전과 거장들과 교류했던 그의 회고록 프로젝트다. 자신의 문학에 대한 인정보다는 레트로 열풍이 문화상품으로 선호되는 시대다.
모임엔 이질적인 구성원이 한 명 더 있다. 배우이자 가수인 '글로리아'다. 문학 모임에서 '뮤즈'와 같은 존재다. 온몸으로 연기하는 그녀는 보이지 않는 가면으로 자신을 둘러싼 예측불허의 기운을 풍긴다. 처음 만날 순간부터 에드는 글로리아에게 끌림을 주체할 수 없다. 얼치기 도련님들과 달리 진정한 삶으로 예술을 구현하려는 둘은 잘 맞는 듯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짜 예술가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 생계유지와 활동 기회 마련이 더 시급한 숙제다.
글로리아의 치명적 매력과 더불어 그녀가 드러내는 현실의 속박은 주인공에게 한없이 하늘로 비상하던 풍선이라도 곧 바람이 빠질 운명을 상기시킨다. 기대를 품었던 낭독회가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지만, 이후에 드러난 진실은 모임을 위기에 빠트린다. 자신들의 실체가 명확하게 인식되자 균열은 삽시간에 지진처럼 들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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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만 다를 뿐, 21세기 문화예술이 직면한 상업주의와 유명세 강박에 그들 역시 얽매인 존재라는 게 확인된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에드는 자신이 잠깐 꿈꿨던 환상이 실은 이미 시효가 끝난 것임을 인정해야만 할까? 이제 (에드가 뉴욕에 정착한 후 떠나지 않았던) 소호와 웨스턴 에비뉴 거리에서 더는 앨런 긴즈버그와 짐 케루악, 윌리엄 S. 버로스, 윌트 휘트먼과 에즈라 파운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흔적을 찾을 순 없는 시대다. 그들의 자취는 마이어스가 거금을 들여 수집한 <네이키드 런치> 초판본으로 대신할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틱톡의 시절이다.
우리의 삶과 예술은 정녕 자유로운가 질문하는 영화
▲ <나의 사적인 예술가> 포스터
ⓒ 티캐스트
감독 켄트 존스는 영화평론가로 출발해 창작 영역으로 진입한 경력자다. 그는 저 유명한 까이에 드 시네마 필진으로 명성을 쌓았고, 뉴욕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문화 행정에도 일가견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에 참여했고 영화 연출 역시 거장들의 일화를 다룬 <히치콕 트뤼포> 다큐멘터리로 출발할 정도다. 그런 만만찮은 이력을 가진 감독의 두 번째 극영화가 <나의 사적인 예술가>란 .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눈에 비친 동시대 예술의 풍경화랄까.
오늘날 문화예술이 유행에 편승한 상품화에 경도된 시대상을 감독은 냉정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가난을 흉내 내고, 세속적 성공을 무시하는 듯하면서 갈구하는 위선적 면모가 과잉된 시대에 예술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우울한 진단을 내비치지만, 그런 냉소에만 그치지 않고 참다운 예술과 삶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관객이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엔 자신의 인생과 취향을 인플루언서 가이드나, 상업 매체 광고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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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의 황금기를 타임캡슐처럼 간직한 과거의 예술가는 영화 내내 혼란에 빠진 상태다. 하지만 그의 심장에 여전히 남은 불씨와 잔향, 그가 먼발치에서 동경하고 종종 교류했던 위대한 옛 작가들 자취가 세속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화하도록 돕는다. 비록 늘그막에 찾아왔던 명성과 부를 획득할 기회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테지만, 풍파를 견뎌온 에드의 황혼은 오랜만에 돌아본 자신의 젊은 날 시와 향수로 그리 외롭진 않을 듯하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이 좀 더 격렬하게 몰아친달까?
명배우 윌렘 데포의 얼굴은 이제 아무 대사를 읊지 않아도 그가 거친 세월의 무게가 퇴적된 주름살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연기를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 듯하다. 여기에 흑백 무성영화 시절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떠올리게 하는 그레타 리의 인상적인 연기가 불꽃을 튀기듯 합류한다. 경험 부족한 샌님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차원의 그들 캐릭터는 화면 속 모임 성원이건, 화면 밖 관객이건 적어도 이들의 연기와 인상만은 깊숙하게 간직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소박한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꼭 필요한 주제를 던진다. 모두가 남들 취향 파악에 혈안이 되고 대세와 주류에 편승하며 자신만의 입장 노출을 겁내는 세상, 하지만 정작 '나는 나야!' 개성 뽐냄이 예찬되는 모순이 난무하는 세태에서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고매한 식견과 품위, 전문지식 같은 진입 턱 대신, 우리 삶과 이를 풍요롭게 해주는 예술의 온당한 자리를 질문한다. 키득키득 웃거나 아련히 바라보다 문득 성찰하게 만드는 마성의 영화다.
<작품정보>
나의 사적인 예술가
LATE FAME
202 미국 드라마
2026.09.23. 개봉 96분 15세 관람가
감독 켄트 존스
제작 마틴 스콜세지
출연 윌렘 대포, 그레타 리, 에드먼드 도노반
수입/배급 ㈜티캐스트
2025 82회 베니스영화제 초청
2026 27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와 만남을 주선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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